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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온라인4/2018년 러시아 가즈아

차범근 독일 위엄 전성기 허벅지 김어준 골모음 (영상) - 1편

갈색폭격기 차붐 (Tscha Bum, Der Braun Bomber)는 우리 나라 축구 역사상 절대 지울 수 없는 가장 큰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세계적인 선수이자 전설인 차범근 선수는 비록 우리나라의 축협에 의해서 상처입혀졌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축구인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은 한국 축구팬이라면 기억해야하는 이름 차범근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차범근 선수에 대한 몇 몇 축구 유명인사들의 코멘트들이 한 때 크게 유행했었습니다.


  • 알렉스 퍼거슨: "우리가 풀지 못했던 주요한 문제는 차붐이었다. (상대 팀 공격수였던) 차붐을 막을 수 없었다"

  • 베켄바우어: "나는 차붐을 낳은 어머니께 경의를 표한다. 그가 독일에 있었다면, 당연히 그를 독일 대표팀에 넣었을 것이다"

  • 루이스 피구: "차붐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웅이다"

  • 미하엘 발락: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


이 외에도 독일의 수상이 우리나라에 와서 무엇보다 먼저 차붐을 만나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고도 합니다. 




차범근 선수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지도자, 해설자, 행정가입니다. 독일에서는 갈색 폭격기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차범근 선수는 당시 세계 최고 리그이던 분데스리그에서 각 팀에 두 명씩 뿐이던 외국인 공격수로 10년을 활약하면서 팀을 두 차례나 유럽 클럽 대항전 최정상에 올려놓았습니다. (현재의 챔피언스리그) 1953년생인 차범근 선수는 183cm에 78kg의 피지컬을 자랑했다고 하는데요. 특히나 어마어마한 허벅지를 자랑했습니다.



차범근 선수는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바이어 레버쿠젠에서 플레이를 했고 은퇴했던 당시에는 외국인 통산 득점 1위를 기록했습니다. 현재 국가대표팀 A매치 최다 출전 및 최다 득점자 이기도 한데요. 58골을 기록했고 이것은 전 세계 축구 선수 A매치 22위에 해당합니다. 당시만해도 완전한 약팀이던 대한민국에서 58골을 기록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당시 분데스리가에서도 어마어마한 골기록을 남기기도 했었는데요.



1979~1983 프랑크푸르트 122경기 66골


1983~1989 레버쿠젠 185경기 82골


1979~1989 분데스리가 통산 308경기 98골, 시즌 통산 372경기 121골



해외 리그에 26세에 진출해서 30대 시절까지 플레이를 했고 말년에는 미드필더로 활약을 했던 여러가지 핸디캡이 있었고 페널티킥을 차지도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어마어마한 기록입니다.



현재 40대 후반이상이 된 당시의 팬들이 기억하는 차범근 선수에 대한 전설과 같은 기록들은 그동안 상당히 오랫동안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가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을 치르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차범근은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공격수에 항상 꼽히던 선수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앙리 이상의 임팩트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될 것같습니다. 어쩌면 우크라이나의 셰브첸코와 비슷하지만 그 이상의 임팩트를 보였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꽤 많은 자료들이 유실이 되어버렸기때문에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독일을 방문한 차범근 선수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당시 차범근 선수의 위엄을 어느 정도는 간접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차범근 감독은 슬하에 딸 1명과 아들 두 명을 두고 있는데요. 첫째 차하나와 둘째인 차두리, 셋째 차세찌가 있으며 둘 째인 차두리가 아버지의 피지컬을 닮아 엄청난 스피드를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차범근 선수는 독일로 가기전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제대회이던 박스 컵에서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마지막 7분간 혼자 3골을 넣어서 무승부를 만들기도 했었는데요. 당시 국대에서는 오른쪽 윙어로 뛰었고 국대에서는 투톱으로 뛰었다고 하며 말년에는 공미로 뛰었습니다.



1990년 한국으로 돌아온 차범근 선수는 차범근 축구교실을 설립하고 사재를 털어가면서 최초로 유소년 육성을 학원외에서 시작하며 어린 선수들을 키워갑니다. 이후 2002년 월드컵을 마친후에는 토토수익금으로 축협에서 처음으로 유소년 정책을 폈습니다. 우리는 차범근을 기억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번에는 차범근 감독이 감독으로서 했던 일과 자식인 차두리 선수 겪었던 어려움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